현대사태와 재벌체제의 붕괴

지난 97년 이후 30대 재벌 중 9개가 무너진 사실은 과거의 재벌체제가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다. 지난 수십여년간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한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에 일조했으며 동남아 국가들의 성공모델로도 여겨졌던 재벌중심의 경제체제가 이제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97년에 기아, 한라, 뉴코아, 98년에 진로, 한일, 거평, 99년에 대우, 해태, 신호. 계열사 매각 등 자구노력과정에서 30대 밖으로 밀려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경영파탄으로 워크아웃, 화의,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무엇이 이들을 실패한 재벌로 만든 것일까. 경제전문가들은 시장의 혁명이 시직되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해온 재벌경영이 붕괴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부자의 퇴진을 이끌어낸 것도 정부나 채권은행이 아니고 시장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3-5월간 펼쳐진 현대 위기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월 왕자의 난, 4월 현대투신 부실, 5월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현대쇼크에서 시장은 현대식 경영에 분명한 거부 메시지를 발신했다. 투신부실로 촉발된 1차 현대 쇼크 때 서울 증시는 4월 26일 23.97포인트, 27일 21.16포인트가 떨어져 이틀간 45.13포인트 폭락했다. 현대가 불러온 두 차례의 증시 대폭락으로 시장에서는 30조원(주식 시가총액 기준)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지난 2년간 30대 재벌에서 사라져간 재벌의 실패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이 가능하다. 아직도 부도의 후유중이 완전히 진화되지 않은 대우는 과다한 차입경영과 무리한 사업확장이 경영실패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기아는 황제식 오너경영과는 반대로 전문경영인 체제의 전형적인 경영실패로 분류되고 있다. 한라, 진로, 뉴코아, 거평 등도 문어발식 사업다각화와 과다한 부채로 인한 유동성 부족이 직접적인 부도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부도가 나기 전 이들 재벌은 대부분 1,000%이상, 최고 2,000%에 달하는 부채비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과다한 은행차입과 방만한 사업확장, 오너 한사람의 독단적 의사결정방식 등은 오래 전부터 우리 재벌들의 체질화된 경영관행이었다. 이것만으로 재벌체제의 붕괴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과거 담합체제 속에서는 은행차입과 문어발식 사업확장, 정부 및 관련기관에 대한 로비력이 기업의 경영능력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주선 연구위원은 "재벌퇴출의 직접적인 계기는 시장이 더 이상 이같은 전근대적인 경영풍토를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이영기 박사는 "시장경제체제가 성숙될수록 시장의 반응에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21세기는 재벌을 포함한 모든 기업의 생존이 시장에서 판가름나고, 시장에서 검증되는 시대이다. 또한 한국경제연구원은 2000년 2월 재벌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보고서를 내며, 급변하는 외부환경에서 기존의 재벌체제로는 경쟁력을 상실해 살아남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 내용을 보면 디지털 경제의 도래로 인한 e-비즈니스의 확대, 구매 공급처의 네트워크화는 기업의 주변환경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기존 재벌의 수직적 계열화나 규모가 종전에 갖고 있던 인센티브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시장형 금융제도의 정착으로 외형위주의 과다한 차입경영이 견제를 받게 되면 재벌은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현대그룹사태와 정주영 명예회장 3부자의 퇴진은 이를 입증하는 단적인 예로 기록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재벌체제의 붕괴현상에 오너를 쫓아내는 것으로 만족하며 제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기는 것은 중대히 잘못된 일이다. 재벌체제의 붕괴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발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현재 지주회사 체제를 통해 각 기업들의 독립경영을 실현하고 연결재무제표 작성의 의무화로 경영 및 회계 투명성을 제고하는 안이 부각되고 있으며, 또 재벌이 사내벤처를 도입하고 벤처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벤처시스템이 재벌체제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안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오너이든 전문경영인 체제이든 시장의 요구에 반응하는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일이며, 오너 개개인들의 독단적 경영이 아닌 스스로 책임을 지는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참고자료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