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리더 안철수] 본질에 충실하라
필자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백신 프로그램을 처음 만든 것은 1988년 의과대학 박사 과정에 있던 때였다. 전공이 환자 진료보다는 실험ㆍ연구 방면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서 컴퓨터를 배웠는데, 단지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로그램 언어를 배우고 있던 터였다.
때마침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 ‘브레인’에 감염되는 일을 당했다. 그리고 이것을 퇴치할 수 없을까 고민 끝에 프로그램 ‘Vaccine’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을 무상 배포했던 것이 인생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컴퓨터가 감염되었을 정도로 피해가 컸는데도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대비책이 전무한 실정이어서 ‘Vaccine’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이후 계속 발견되는 신종 바이러스는 모두 필자에게 문의가 들어와 보람과 사명감을 느꼈다. 전공 공부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으므로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6시까지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고, 잠시 눈을 붙인 후 하루 종일 의학을 공부하는 힘든 생활을 7년 동안 계속했다. 그 결과 ‘Vaccine’의 기능이 대폭 확장된 ‘V3’가 탄생하게 되었다.
◆ 서초동 골목서 직원 2명으로 시작
1994년 중반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마친 다음부터 1995년 초까지 본격적인 바이러스 연구소 설립을 생각하고 비영리법인 형태의 컴퓨터바이러스 연구소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PC 제조업체, 공공기관 등을 찾아다니며 기술 이전을 제안했지만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한글과컴퓨터사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연구소의 전반적인 운영과 개발은 필자가 맡고, V3의 독점 판매권은 한글과컴퓨터가 보유한다는 조건으로 연 5억원의 매출을 보장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주식회사 형태인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V3의 맥을 이어야 했기 때문에 고민 끝에 그 제의를 수락했다.
필자의 이름을 내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95년 2월 16일이었다. 주식회사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 서울 서초동 골목의 조그마한 사무실 공간에 필자와 두 명의 직원이 전부였다. 막상 회사를 세우기는 했지만 사실 시장이 없어 막막한 심정이었다. 당시 V3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이 열릴 때까지 기술을 개발하면서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열악한 상황에서 유학은 분명 무리였다. 그러나 그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유학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 나이 30대 중반에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의학과 컴퓨터 두 전공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메디컬 인포메틱스(medical informatics) 즉 의료정보학을 공부할 계획이었으나, 당분간은 회사 경영에 필요한 지식이 더 절실해 펜실베이니아대학의 EMTM 과정(Executive Master of Technology Management : 일종의 테크노 MBA 과정)에 입학했다. 일반 MBA가 금융업·제조업 등의 전 산업분야에 걸쳐 필요한 경영을 배우는 데 비해서 테크노 MBA 과정은 말 그대로 첨단 기술의 경영에 관계된 부분을 배우는 과정이다. 따라서 경영과 기술적인 지식 모두가 필요한 벤처기업의 경영자에게는 꼭 맞는 과정이었다.
사실 필자에게는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다. 전공인 생리학 분야에서 언젠가는 노벨의학상을 받겠다는 꿈이었다. 회사를 만들면서 그 꿈은 완전히 접어야 했다. 아무런 소질도 경험도 없이 회사를 만든 탓에 경영 공부를 한시라도 빨리 하는 것이 회사를 위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서울의대 졸업, 20대 의학박사, 20대 의대교수로 이어지던 순탄한 과정은 남들에게는 좋아보였을지 모르지만 컴퓨터를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자부심ㆍ보람ㆍ사명감ㆍ성취감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을 졸업할 무렵 필자는 10년 이상 공부해온 의학과 완전히 이별을 선언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영학을 통해 배운 것들을 한국과의 업무 협의에 조금씩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회사와는 하루 평균 2시간 정도 이메일로 업무 연락을 했는데 조직론을 배우면 그것을 회사 업무에 적용하는 식으로 경영 기법을 응용해 나갔다. 회사 일과 공부, 두 가지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일과를 빡빡하게 짰다. 공부의 양이 늘어나자 잠 자는 시간도 대폭 줄여야 했다. 그래서 이틀에 하루는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1995년 9월부터 1997년 8월까지의 2년은, 개인적인 휴식에는 시간을 전혀 투자하지 않았다. 늘 몸과 마음이 바빴고 시간은 부족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 2년 동안 격일로 잠을 자
펜실베이니아대학은 가을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도 캠퍼스의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수업을 듣기 위해 들어간 강의실 외에는 어떤 풍경도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학교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 것은 졸업할 무렵이 되어서였다. 대학원 공부를 마쳤을 때 필자는 머리에 내재화된 경영학의 무게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마침내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경영은 종합예술과 같다는 것이었다. 처음 유학갈 때만 해도 경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경영학을 배우면서 누구나 노력 여하에 따라 전문가가 될 수는 있지만 성공적인 경영자가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97년 말 외환위기와 IMF 체제의 어려운 상황에서 귀국했다. 회사는 그때까지 척박한 보안시장 환경에서 큰 호재없이도 조금씩 성장해온 터라 IMF가 새삼스러운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위기가 지나면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연구개발에 집중해 다양한 제품군을 출시했고 99년 안티바이러스시장이 5배 가까이 급성장할 때 시장을 리드해 국내 보안 업계 최초로 매출 100억원을 돌파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2000년부터는 국내 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백신 전문 기업에서 통합보안 기업으로 도약해가고 있고 2001년 코스닥에 등록하는 한편 현재 250명 규모의 조직을 시스템화해가고 있다.
2000년 중반 당시 회사는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고 매출은 늘어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가치체계가 불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2000년 중반부터는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스탠퍼드대학에서 ‘Built to Last’(경영서로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의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인 제리 포라스의 강의를 직접 들으며 오랫동안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성공 가도를 달리며 영속하는 기업에는 고유의 핵심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고민 결과 회사 구성원들이 내재화하고 실천할 수 있는 핵심가치를 정립, 명문화했다.
그것을 정하는 방식으로는 소수 경영진이 정해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렇게 정리된 우리의 핵심 가치는 이러하다. 1)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2) 존중과 신뢰로 서로와 회사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한다. 3) 고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객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필자가 경영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 중의 하나는, 사회에 기여하는 가치있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윤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건전한 기업 활동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주에 절대적인 존재가 있든 없든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필자의 인생 철학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자료원 : 주간조선, 172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