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 경영체제 시동

3세 경영체제 시동 - 경영세습

지난 3월9일 서울 순화동 호암아트홀. 삼성전자 32기 정기 주주총회장. 김귀식 참여연대 정책실장이 포문을 열었다. 김실장은 “1991년 입사 뒤 유학만 다녀온 이재용씨가 어떻게 바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바로 맞받아쳤다. 윤부회장은 “재용씨를 승진시켜 적절히 배치하는 것은 경영진의 판단이며 모토로라는 창업자의 손자가, 포드는 증손자가 회장”이라고 답했다. 이틀 뒤인 3월11일.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장남인 재용(33)씨는 삼성전자 사장단·임원 승진 인사에서 경영기획팀 상무보(옛 이사보)로 선임됐다. ‘3세 경영’-. 재계 경영지도가 3세 체제로 바뀌고 있다. 구본무 LG 회장, 이웅렬 코오롱 회장 등이 3세 체제를 굳힌 데 이어 삼성의 이재용씨도 드디어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사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뒤 재벌체제로 대변되는 한국식 자본주의는 막을 내리는 듯 보였다. 재계 서열 2위였던 대우가 공중분해됐고 철옹성 같던 현대도 이른바 ‘왕자의 난’ 뒤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급격히 무너졌다. 그렇지만 지난해 말 인사와 대주주 지분정리 등을 기점으로 재벌가 3세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1997년 말부터 삼성의 인터넷 사업을 물밑 지휘하던 이재용씨의 공식 가세로 더욱 힘을 받고 있다. 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재벌사가 이제는 2세 체제를 넘어 3세 체제로 접어드는 모습이다. 재계 3세 구도는 크게 두 가지 패턴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미 뿌리를 내린 ‘착근형’과 경영수업 중인 ‘성장형’이다. 먼저 착근형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구본무 LG 회장과 이웅렬 코오롱 회장이다. LG는 창업자인 故 구인회 회장과 구자경 명예회장을 거쳐 구본무 회장에 이르고 있다. 코오롱도 창업자인 故 이원만 회장과 이동찬 명예회장의 바통을 이웅렬 회장이 이어받아 성공적인 승계 구도를 구축했다. 수성(守城)은 창업(創業)보다 더 어렵다고 했던가. 이들 그룹은 ‘준비된 승계’가 잘 이뤄져 재계의 부러움을 샀다. 구본무 LG 회장과 이웅렬 코오롱 회장은 아버지 밑에서 이른바 ‘제왕학 교육’을 철저히 받은 뒤 대권을 물려받았다. 이들은 말단사원에서 출발해 경험을 쌓았고 임원이 된 뒤에는 회장직에 필요한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유원건설을 비롯 상당수 재벌가 2세들이 선친의 유고(有故) 탓에 갑자기 총수 자리에 올라 몰락의 길을 걸은 것과 대조적이다. 예컨대 구본무 회장의 경우 회장 취임이 임박했을 무렵 그룹 내 각 분야 원로 경영진이 돌아가며 특강을 실시했다. 노조와의 관계부터 의사결정 방법에 이르기까지 그룹경영 전반에 대한 세세한 교육을 받았다. 이웅렬 회장도 마찬가지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아들에게 철저히 수업을 시켰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삼성측은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이 IT 분야를, 황영기 삼성투신 사장이 금융 중심의 경제 분야를 맡아 ‘한 수’ 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886년 두산상회로 출발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두산그룹 가문의 3세 경영체제도 뿌리 깊다. 두산그룹은 3세 경영자가 1명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 또 이미 4세 경영자들이 경영수업을 받고 있기도 하다. 두산그룹 계보는 故 박승직 창업주→故 박두병 회장→박용곤 명예회장, 박용오 두산 회장, 박용성 OB맥주 회장, 박용만 전략기획본부 사장으로 이어져 있다. 이 가운데 박용만 두산 전략기획본부 사장은 두산의 인터넷시대 경영혁명을 이끄는 차세대 주자라는 평가다. 박용만 사장은 지난 1995년 그룹 기획조정 실장에 취임한 뒤 그룹을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그는 특히 지난해 한국중공업을 인수해 두산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소비재에서 중간 산업재 중심으로 바꿔가고 있다. 형제간 역할을 분담하며 3세 체제가 완숙기에 접어든 두산그룹은 이미 4세들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원(39)씨가 두산의 상사BG 부사장이고, 둘째 지원(36)씨는 자동차BU장 상무다. 박용오 회장의 아들 경원(37)씨는 연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뒤 두산건설의 영업본부 상무로 있으며, 둘째 아들 중원(32)씨는 두산 전략기획본부 뉴욕지사 과장이다. 또 박용성 OB맥주 회장의 3남 진원(33)씨는 두산 전략기획본부 TRI-C팀 차장, 석원(30)씨는 두산 벤처BG 대리로 있다. 부분 착근형인 케이스도 있다. 그룹 지배체제를 거의 굳혔지만 전문경영인과 공존하는 SK가 대표적이다. SK는 할아버지-아버지-손자로 이어지는 3대 체제가 아니라 형-동생-조카로 이어지는 이른바 2.5세 체제다. 1998년 8월 작고한 故 최종현 회장은 76년 SK 창업주인 故 최종건 회장의 뒤를 이었고, 고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 SK㈜ 회장(42)이 대권을 물려받았다. 현재 전문경영인인 손길승 회장이 그룹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최태원 SK㈜ 회장 지배력이 공고해지고 있다. 1999년 SK㈜ 회장이 된 최태원씨는 SK의 새로운 지주회사로 떠오른 SK C&C의 대주주에 올라 그룹 지배구도를 강화했다. 또 원로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계열사 사장단을 50년대생으로 재배치했다. 최태원 회장은 특히 동생 최재원씨를 SK텔레콤 전무와 사촌 동생인 최창원 SK글로벌 전무를 부사장으로, 고종사촌 형인 표문수 SK텔레콤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켜 전문경영인 시대에 역행한다는 눈총을 받기도 했다. ‘성장형’ 패턴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삼성가에서 분가한 제일제당·한솔그룹·신세계 등이다. 이재현 제일제당 부회장(40)은 삼성가의 장손이다. 장남이면서도 부친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삼성가의 대통을 이어받지 못한 이맹희씨의 아들. 고려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83년 씨티은행에 들어가 경험을 쌓았고, 85년 제일제당에 사원으로 입사한 뒤, 98년 그룹 부회장을 맡았다. 한솔그룹의 경우는 삼성가의 맏딸인 이인희 회장의 맏이인 조동혁(51) 부회장이 금융부문을, 동만(48)씨가 한솔텔레콤 부회장, 동길(46)씨는 제지부문 부회장을 나눠 맡고 있다.세 아들이 그룹의 삼두마차로 3세 경영체제를 이끌고 있다. 특히 조동혁 부회장은 삼성가의 3세 가운데 맏형격이다. 신세계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지만 신세계 가문의 외아들인 정용진(33) 부사장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정용진씨는 이명희 회장의 아들로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브라운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94년 삼성물산에 입사한 뒤 이듬해 신세계로 옮겼다. 효성그룹에서도 3세가 약진하고 있다. 조석래 회장의 장남 현준(33)씨가 (주)효성 전략본부 전무로 있다. 예일대 정치학과를 나와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법학석사를 받았다. 92∼93년 미쓰비시 상사, 96∼97년 모건스탠리 동경지사에 근무하며 경험을 쌓았다. 97년 효성에 입사한 뒤 그룹업종을 정보통신과 생명공학으로 바꿔가고 있다. 동생 현문(32)씨는 서울대 고고학과를 나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뒤 로펌에서 일하다가 98년 입사했다. 형과 함께 전략본부에서 전무로 근무하고 있다. 삼성가문의 ‘본류’와 현대가문은 출발형 ‘성장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재용씨가 삼성전자 상무보로 경영일선에 뛰어들면서 故 이병철 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씨로 이어지는 3대 라인이 구축됐다. 서울대-게이오대-하버드대를 거친 이재용씨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규모의 삼성그룹 지분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인 故 이병철 회장과 아버지 이건희 회장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 3대가 모두 일본에서 유학했다. 현대의 경우 정주영 명예회장→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정의선씨, 정주영→故 정몽우씨→정일선씨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가의 3세들은 아직 경영수업을 받는 단계다.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이자 정주영 前 현대 명예회장의 장손인 의선(41)씨는 1999년 말 현대차에 입사한 뒤 지난해 말 상무로 승진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은 의선씨는 일본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 근무하며 경험을 쌓았고, 현대차 공장과 연구소를 둘러보며 일찍부터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지난해 12월 초 기아자동차 이사에서 삼미특수강 상무로 승진한 일선(31)씨도 관심 인물. 사촌인 의선씨와 동갑으로 어린 시절부터 같이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아직 지분이 없는 월급쟁이에 불과하지만 차기를 염두에 두고 모두 중요 포스트에서 착실하게 경험을 쌓고 있다. 전경련 회장단 23명 가운데 구본무 LG 회장과 이웅렬 코오롱 회장 정도를 빼곤 대부분 창업 2세대다. 재벌그룹의 3세 체제는 도입기다. 다만 21세기는 3세대들이 나래를 펼 시기다. 인터넷 시대와 더불어 등장하고 있는 3세 경영인들은 하나같이 치밀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특히 ‘성장형’ 그룹에 드는 3세들은 대개 ‘해외파’로 글로벌스탠더드가 중시되는 상황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 다만 3세 승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상속 과정이 투명하지 않고 산전수전 겪으며 일가를 이룬 창업세대와 달리 경영능력도 검증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2세들은 창업자와 더불어 기업을 키워와 비교적 자연스레 대권을 넘겨받았지만 3세들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 물론 재벌 견제장치가 날로 두터워지고 있는 상황인데다 대표이사가 아니라면 재벌 3세가 경영참여를 두고 감 놔라 배 놔라 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전문경영인이 더 낫다는 증거도 많지 않다. 결국 재벌 3세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지는 ‘본인 하기 나름’이다. ‘홀로서기’가 가능한 경영능력이 무엇보다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는 전적으로 3세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들 3세들이 어떻게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기업의 명암도 엇갈리고 재계지도도 달라질 전망이다.

자료원 : 이코노미스트 제5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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