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 뒤흔들었던 '현대쇼크'
이헌재 장관 주재로 열린 25일 경제장관 간담회에서 한국투자신탁과 대한투자신탁에 총 5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투신안정대책이 발표됐다. 현대투자신탁은 공적자금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참여연대와 정부의 이런 묘한 기류는 이튿날인 26일 '현대그룹 쇼크'로 반영됐다. 바이코리아에 대한 실망과 현대투신운용에 대한 공적자금 배제가 현대그룹주에 대한 투매로 연결됐다. 비공식 모임에서나 거론돼 왔던 현대그룹에 대한 위기 우려가 현실화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순식간에 번졌다. 해외 투자가들 사이에선 한국에 제2금융위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돌았다.
'현대쇼크'는 27일까지 이어지면서 현대그룹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음은 물론 금융시스템 전반에 대한 ‘건강’을 체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동시에 투신권의 구조조정을 표면화시키고 4대 그룹에 대한 세무조사의 강도를 더해 주고 있다. 투신권에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명분도 제공했다. 투신권의 구조조정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투신권의 악령은 정부와 투신사의 공동책임이다. 정부와 투신권 스스로 부실을 덮어 두거나 시장이 좋아질 때로 미뤄 왔을 뿐 근본적인 처방을 내리는데 너무 안이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는 투신권 구조조정을 둘러싼 이런저런 비판과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결국 이솝우화처럼 ‘나귀를 매고 가게 될’ 우를 범하고 말았다. 뒤늦은 처방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서고 있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투신권의 구조조정, 그리고 그 중심에 현대투신증권과 현대투신운용이 놓여 있다. 이들 현대투신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가 국가 신용도에까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대그룹의 위기여부와 맞물려 있는 현대투신 경영 정상화 추진과정이 주목된다.
◇ 현대투신증권 탄생과 위기
현대투신증권(운용사 포함)의 전신인 국민투자신탁은 82년 6월에 탄생했다. 당시 한국투자신탁과 대한투자신탁은 이미 영업을 시작한 지 12년째를 맞아 고객자산이 1조원을 넘어섰을 때였다. 국민투신은 이후 15년만인 97년 4월 현대그룹 계열사로 정식 편입됐다. 이에 앞서 수익증권 판매와 운용을 분리한다는 전략으로 증권사와 투신운용사로 분리됐다. 현대그룹으로 편입된 국민투신은 IMF쇼크 후 오히려 현대그룹을 배경으로 도약의 호기를 맞았다. 국민투신의 저축고는 96년 4월 10조원에서 97년 11월 15조원, 98년 6월 20조원으로 늘었다. 이런 와중에 98년 9월 호남에 연고를 둔 한남투자신탁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인수하게 된다. 한남투신 인수배경은 투신권의 연쇄도산을 우려한 증권당국의 강력한 권유와 현대그룹의 금융부문 확장전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후 현대투신으로 간판을 바꾼 직후인 99년 5월 저축고는 30조원을 넘어섰다. 단기간에 저축고가 크게 늘어난 배경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작품’으로 알려진 바이코리아의 영향이 컸다.
현대투신증권은 현대증권과 공동으로 초대형 펀드인 바이코리아펀드를 3년내 1백조원의 매머드급 펀드로 키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을 때였다.
이런 고속성장이 지금에 와선 모두 화근이 되고 있다. 특히 현대그룹의 무리한 국민투자신탁 인수와 뒤이어 한남투신의 끌어안기는 그룹 전체의 리스크를 한층 키운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투신회사의 인수를 통해 현대그룹이 엄청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거대한 파이프라인을 구축함으로써 ‘본전을 모두 뽑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뒤따른다. 정부의 고민덩어리로 여겨진 기아자동차는 물론 반도체 빅딜과정에서 LG반도체를 인수함으로써 현대그룹의 저력(?)을 보여 줬다. 정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기섞인 질투에도 불구하고 ‘골칫덩어리’의 해결사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막대한 자금동원력을 가진 현대투신을 보유하고 있기에 가능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고객돈을 자기돈처럼 써왔거나 이용한 게 아니냐는 의심은 여기서 나온다.
현대투신의 부실은 이처럼 그룹의 뒷돈 대주기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주주 지분 매매 창구로 활용되면서 눈덩이처럼 부풀어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금융감독원 조사 및 참여연대의 장부열람 결과 바이코리아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현대투신운용이 고객자산(신탁재산)으로 현대투신증권의 불량채권이나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주길 일삼았던 것으로 지적됐다. 고가로 채권을 인수하고 마구잡이로 돈을 끌어다 쓰면서 부실을 키워 왔던 셈이다.
◇ 어느 정도 부실한가
현대투신증권은 지난 3월말 기준 4천53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하지만 각종 부실채권을 손실로 반영하는 바람에 대규모 적자를 면치 못했다. 대우채에 따른 부실을 떠안는 과정에서 8천86억원의 손실이 발생한 데다 러시아펀드에서 발생한 손실 8백억원도 적자규모를 확대하는 데 한 몫 했다. 이에 따라 자기자본은 1조1천9백95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상태다. 자본금 8천1백52억원의 2배를 훨씬 넘는 규모다. 현대투신증권은 후순위채 발행 등을 통해 신탁자산을 대부분 클린화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처리해야 할 부실채권이 5천억원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객의 자산을 담보로 끌어다 쓴 연계 차입금은 약 3조3천억원에 달한다. 이런 차입금은 오래 전부터 누적돼 왔다. 89년도 증시부양조치와 98년 한남투신인수 과정에서 발생한 부분도 포함된 것이다. 현대투신은 한남투신인수 과정에서 6천억원 정도의 손실이 났다. 현대투신증권은 자본잠식 규모와 연계 차입금을 합쳐 3조6천5백억원 정도의 차입금을 안고 있다. 현대그룹이 공식적으로 내놓은 그룹 전체의 금융기관 차입금(37조5천억원)의 10% 정도에 달한 규모다.
◇ 현대측 정상화 계획은 무엇인가
이창식 현대투신증권 대표이사는 “정부의 도움을 받아 경영정상화에 도달하면 대주주 보유 주식의 상당부분(발행주식의 8%)을 그때의 시가보다 싼 가격으로 일반에게 공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상화에 따른 대주주의 주식이득을 사회에 내놓겠다는 얘기다. 이사장은 “현재 갖고 있는 연계콜 3조2천8백억원을 연말까지 해소하도록 돼 있는데 자체로서는 이를 해결할 방안이 없어 정부가 도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자체해결 능력이 없음을 공식화한 셈이다.
정상화 타임 스케줄은 2003년까지 3년 정도로 잡았다. 2003년 3월까지 총 2조7천억원의 자본금을 확충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우선 올해 2천억원의 외자를 유치하고 ▶2001~2002년에 현대투신운용을 코스닥에 등록한 뒤 지분매각을 통해 7천억원(주당 4만원 기준)을 조달하며 ▶2002년에는 현대투신증권을 코스닥에 등록, 공모를 통해 2천억원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동시에 2000~2002년까지 1조4천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린다는 야무진 설계안을 공개했다.
◇ 정상화 가능할까
현대투신의 정상화계획 골격은 현재 잠식상태인 자기자본을 3년내 플러스 1조5천억원으로 돌려놓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당장 외자유치가 순탄치 않고 코스닥시장에 고가로 지분을 매각하겠다는 계획도 설득력을 잃는다. 운용사 매각 역시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의 운용사 분리 후 매각과 맞물려 쉽지 않은 여건이다. 운용사에 대한 매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점도 부담이다.
당장 급한 연계 차입금 처리가 가장 큰 문제다. 정부와 IMF가 연계 차입금을 연내 해결하기로 합의한 탓에 현대투신증권은 연말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갚아야 한다. 현대측이 정부에 손을 벌리는 이유도 이런 배경에서다.
스스로 해결능력을 잃은 현대투신 문제는 이제 얼마 정도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느냐 여부와 동시에 대주주들의 사재출연 여부가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현대투자신탁증권의 지분은 현대전자 27%, 현대증권 24.22%, 개인주주 28.71%, 우리사주 5.08%, 증권사 등 기관투자가 14.99% 등으로 구성돼 있다. 정부보다는 엄연히 대주주가 존재하는 만큼 1차적으로 대주주들의 책임론에 무게가 실려 있다.
자료원 : 이코노미스트 제535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