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 성공으로 호황 누리는 이색업소들


벤처기업에 다니고 있는 김모 과장은 대기업에서 벤처로 자리를 옮긴 대표적인 경우다. 과장이 벤처로 자리를 옮긴 것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도 없이 단지 대기업에 다니면서 하나의 기능만을 전담하는 부품처럼 살고 있다는 회의 때문이었다. 연봉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규모가 크지도 않은 벤처기업이지만 가능성과 그에 대한 보상이 확실하다는 믿음으로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 그러나 김과장은 요즈음 주위 사람들에게 “돈 좀 챙기지 않았느냐”는 얘기를 들으면서 속앓이를 하게 된다. 벤처기업인들이 하룻밤에 엄청난 술값을 써대는 졸부 흉내를 낸다는 얘기가 매스컴에서 하루 건너 한 번씩 나오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김과장은 오히려 과도한 업무에 집안일도 챙길 시간이 사라져 버릴 정도로 열악한 근무 환경 때문에 술자리를 가진 지 한 달도 넘었다. “차라리 술 마실 시간이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벤처기업에 다니는 사람치고 그렇게 술 마시고 즐길 시간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김과장의 하소연도 하소연이지만 테헤란 밸리에서 흥청거리는 문화는 벤처의 것이 아니다. 벤처로 인해 새로이 각광받는 이색업소들을 살펴보면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벤처기업의 산실로 일컬어지는 테헤란 밸리는 ‘닷컴’기업들이 대세를 이루면서 서로간의 도움 없이는 존재하기 힘들 만큼 기업간 정보교류가 활발하다. 물론 이메일 같은 전자적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휴먼 네트워크를 확장하는데는 역시 만남이 필요하다. 아직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벤처기업들이 완결된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호협력관계는 이들에게 생명줄과도 같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벤처기업인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가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정보카페’다. 선릉역 부근에 위치한 정보카페는 말 그대로 벤처기업인들의 정보 교환을 목적으로 생긴 카페다. 마치 중세 프랑스의 살롱 문화를 연상시키는 이 카페는 벤처기업가는 물론 대기업 인터넷팀, 회계사, 교수, 언론인, 중소기업청 관계자까지 2백여명이 참석하는 친목 모임인 ‘T-Valley 클럽’의 모임 장소. T-Valley 클럽은 링크인터내셔널의 정혜숙 사장이 주도하는 모임으로 특별한 회원자격이나 회비가 없어 명함만 준비하면 참석할 수 있다. 매달 모임의 호스트가 그날 안주와 맥주를 제공한다. 지난 17일 가진 모임은 삼보컴퓨터가 호스트를 맡았다. 이 모임에 참석하면 최근 벤처기업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이름만 알았던 벤처인들을 만날 수도 있다. 정보카페는 벤처기업들로 인해 생긴 새로운 명소가 됐다. 이와 함께 테헤란로에 곧 벤처기업인들이 모일 수 있는 또하나의 카페가 생길 것 같다. 한국소프트중심(대표 이규창)은 6백평 규모로 오픈하는 자사의 유통매장 내에 벤처기업인들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이 장소 또한 새로운 테헤란 밸리의 명소로 자리할 듯하다. 밤낮없이 일하는 벤처인들에게 이발이나 목욕은 잠깐 동안이나마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이다. 하지만 과도한 업무 때문에 휴식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다. 테헤란 밸리에 이런 벤처인들이 애용하는 이발소가 생겨 인기가 높다. ‘블루클럽’이 그곳. 연탄난로 연통에 수건을 말리는 동네 이발소의 풍경은 없지만 산뜻하고 부담없이 이발할 수 있는 곳이다. 인터넷 시대에 맞게 홈페이지 (blueclub.co.kr)도 개설해 놓고 있다. 아줌마들로 북적대는 미용실이 부담스럽고 ‘안마해 드릴까요’하며 코맹맹이 소리로 접근하는 여자들이 있는 이발소가 귀찮은 이들을 위해서는 만점인 곳이다. 블루클럽은 남성커트가 5천원이다. 회원카드를 발급해 1회당 5%씩 할인해 열 번이면 한 번은 무료로 깎을 수도 있다. 샴푸로 머리를 감을 때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면 1천원이 추가되지만, 셀프일 경우는 물론 무료다. 헤어스타일링을 할 수 있는 무스, 스프레이 등 각종 제품도 구비돼 있다. 남성커트는 15분이면 OK! 점심식사 시간과 퇴근시간대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를 겪을 때도 있지만 그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다. 20, 30대가 주를 이루는 벤처인들이 사실 딱히 갈 만한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술문화보다는 간편한 맥주에 대화가 가능한 공간이 사랑받는 이유도 이들의 성향을 잘 보여 준다. 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유행하기 시작한 재즈 열풍으로 ‘원스 인 어 블루문(Once in a bluemoom)’ 같은 재즈 카페들이 벤처인들이 자주 가는 세련된 곳으로 꼽힌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 위치한 이 재즈카페는 벤처인들만이 가는 곳은 아니지만 고급스런 취향을 즐기는 재즈 매니어들에겐 너무나 잘 알려진 명소. 재즈라이브를 즐길 수 있어 무리 지어 가기보다는 마음 맞는 동료들과 오롯이 찾으면 좋은 곳. 하지만 만만찮은 술값·안주값이 좀 부담된다. 삼성동에 위치한 386카페는 386 세대들이 학창시절 강의를 제끼고 전전했던 주점을 연상시키는 곳. 들어서면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옛날 분위기에 음악도 과거 유행했던 포크곡들이 주를 이뤄 향수에 젖게 한다. NC소프트의 정장한 대리는 “386세대는 아니지만 386세대의 성향을 갖고 있어선지 이 곳을 찾는 벤처인들이 많고, 직원들도 자주 이곳에서 모인다”고 말한다. 막걸리에 파전을 즐기며 학창시절을 추억하기 좋은 곳이다. 야후가 강남으로 이사하면서 속칭 ‘야후골목’으로 불리는 이곳을 조금 들어가면 로빈 힐이라는 호프집이 자리하고 있다. 한라클래식이라는 대형 오피스텔의 1층에 있는 이 호프집은 넓고 편안한 의자와 깔끔하고 고급스런 메뉴를 제공하는 벤처인들의 휴식공간이다. 1층은 주로 적은 수의 손님들이 편안하게 맥주에 안주를 곁들여 대화할 수 있고, 2층은 단체 회식을 위한 넓은 자리와 노래방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따로 2차를 갈 필요가 없다. 호텔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이 멋스런 유니폼에 헤드셋 무전기를 차고 서비스하는 모습도 이채롭다. 또 오후 8시30분부터 11시까지 그룹 ‘로빈트리오’가 신청곡을 들려 준다. 건아들의 멤버였던 이들은 70년대 편안한 레퍼토리를 위주로 피로를 씻어 준다. 지난달 오픈한 인터넷 플라자 N·E·T는 편리한 교통과 넓은 공간 때문에 벤처인들이 만남의 장소로 애용하고 있다. 인터넷 플라자 N·E·T는 정보통신부와 SK텔레콤이 지난해부터 추진해 온 서울 소프트 타운 조성계획에 따라 SK텔레콤이 60억원을 투자해 설립했다. 3개 층에 전용면적 4백80평 규모로 인터넷 게임·채팅, 이벤트 홀, 비즈니스 존, 교육장, 커뮤니티 존을 갖춘 국내 최대의 인터넷 비즈니스 및 문화공간이다. 인터넷 플라자 N·E·T는 일반인들에게 초고속 인터넷(T1급)을 쉽게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인터넷 게임, 교육, 홈쇼핑 등 첨단 사이버 문화를 확산하고 인터넷 이용자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됐다. N·E·T는 휴일 없이 24시간 운영되며 비즈니스 룸 등 일부 시설물을 제외한 인터넷 체험관, 인터넷 카페 등 시설물이 무료로 제공된다. N·E·T의 황종식 대리는 “수익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인터넷 확산을 목표로 서비스 차원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이윤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첨단 장비들과 넓은 장소들을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벤트 홀에서는 간단한 다과를 곁들여 회의장소로 이용할 수도 있다. 그래서 특별한 홍보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말한다. 흔히 게임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양한 이용이 가능한 인터넷 복합건물이다. 밤을 새우기가 일쑤인 벤처인들에게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 깊은 새벽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식사를 거른 이들이 출근하면서 간단한 식사를 하는 것도 이 곳에서는 이미 낯선 풍경이 아니다. 특히 벤처타운 같은 벤처기업 집적시설 부근의 편의점은 낮보다 아침이나 밤에 더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인 김근한씨는 “밤이 돼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이 근처의 편의점들은 김밥, 맥주, 간단한 안주와 컵라면 같은 요깃거리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이 생활을 밀어낸 벤처인들에게 퇴근시간이 따로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맘 편하게 사람을 만나고 즐길 만한 여유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이들이 밀집해 있는 테헤란 밸리라 해도 마땅히 갈 만한 특별한 공간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주가 상승으로 ‘신흥재벌’로 오인받는 벤처인들에게 ‘졸부’라는 것 때문에 하룻밤에 1천만원이 드는 술자리가 마치 흔히 있는 일처럼 알려지기도 하지만 실제 그런 접대가 필요한 벤처인들은 거의 없다. 물론 테헤란 밸리에 값비싼 술집과 퇴폐업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벤처인들이 고객인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딱히 비즈니스와 문화가 결합된 공간이 별로 없다”고 벤처인들은 말한다. 미국의 골드러시 때 돈을 벌었던 사업이 황금을 찾아가는 길목의 술집이었던 것처럼 벤처들의 생리에 맞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사업에 나서는 것도 괜찮은 아이템이 될 것이다.


자료원 : 이코노미스트 제5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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